#김모 씨(44)는 서울 강북에서 전세를 살다가 내년에 중학생이 되는 딸을 위해 지난달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전세 8억 원(전용면적 76m²)에 계약했다. 4000채가 넘는 단지에 매물이 없어 발을 구르다가 간신히 구한 집이었다. 하지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은 같은 평형의 집을 전세 4억2000만 원에 계약했다는 얘길 들었다. 새 임대차법의 계약갱신요구권과 전월세상한제를 활용해 전세 보증금을 5%만 올려 계약했다는 말을 듣고 허탈해졌다. 김 씨는 “같은 아파트, 같은 면적인데 가격이 두 배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 “전세대란에도 손놓은 정부에 더 화나”
13일 동아일보 취재진이 만난 세입자들은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정부가 ‘불편’ 정도로 취급하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 사는 동네에서 계속 전세를 살기 위해선 수억 원의 빚을 지는 것 말곤 답이 없는데도 정부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하니 속이 터진다는 것이다. 임대차법 시행 100일이 지나면서 ‘아노미’ 상태에 빠진 전세시장을 두고 정부가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집주인과 세입자들은 ‘내전’을 벌이고 있다.
김 씨는 현재 오피스텔 월세를 알아보는 중이다. 김 씨는 “한 달에 70만∼100만 원씩 주고 방 한 칸짜리 오피스텔에 살거나 시댁이나 친정집에 얹혀살아야 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 정부는 “정책 탓 아냐” “참고 기다리면 돼”
상황이 이런데도 청와대,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 부동산 정책 결정권자들은 현재의 전세대란을 부동산 실정(失政)보다는 외부 요인으로 돌리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3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최근 전세난의) 근본 원인은 코로나를 겪으면서 기준금리가 0.5%로 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도 지난달 28일 부동산 관계장관회의에서 저금리를 지목했다. 하지만 기준금리는 5월부터 0.5%인데, 전세 물건이 줄어들기 시작한 건 임대차법이 시행된 직후인 8월부터였고, 서울 보증금 급등세가 수치에 반영되기 시작한 건 10월부터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세시장을 기필코 안정시키겠다”고 밝힌 지 보름이 지났지만 정부는 여전히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홍 부총리는 지난주 “확실한 (전세) 대책이 있으면 정부가 (발표)했을 것”이라고 말해 공분을 샀다.
저금리 기조 등이 전세금을 끌어올린 요인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무리하게 밀어붙인 임대차법의 부작용은 인정하지 않고 전세난의 원인을 시장 환경으로만 돌리려다 보니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정부가 전세대란에 눈물 흘리는 서민들의 처지를 헤아리기는커녕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려 민심은 더욱 들끓고 있다. 김상조 대통령정책실장은 2일 방송에 출연해 “과거 전세 계약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렸을 때 7개월 정도 과도기적 불안정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임대차3법 등 급격한 시장 변화로 과도기가 길어질 수 있다”며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이호승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도 “제도 변경에 따른 일시적 영향은 감내하고 참아줘야 한다”고 말했다.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전세시장에서 생기는 문제를 땜질식으로 해결하려 하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 스스로 정책 기조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야 한다”며 “시장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선행돼야 제대로 된 전세대책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종=송충현 balgun@donga.com / 김호경·정순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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