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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대만 쑥쑥 크는데...韓 매출 천억 넘는 팹리스 고작 6곳 - 매일경제

[위클리반도체] 코로나 19 이후 산업계의 첫 번째 흐름은 디지털 대전환이다. 인공지능(AI)·자율주행차 등 코로나 이전부터 개화를 시작한 신산업의 성장도 또 하나의 흐름이다. 전 세계 산업계의 이 같은 변화를 뒷받침하는 핵심 부품은 시스템 반도체다.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는 첨단 정보기술(IT) 기기와 자율차·전기차(EV)의 두뇌 역할을 할 로직·아날로그 집적회로(IC) 반도체를 설계하는 전문기업(팹리스), 설계대로 반도체를 수탁생산하는 파운드리 기업으로 이뤄진다.

시장조사기관 IC인사이츠에 따르면 2010년 635억달러였던 전 세계 팹리스 매출은 지난해 약 1300억달러로 10년간 2배 성장했다. 미래 성장성도 높다. 한국수출입은행의 최신 자료를 보면, 2025년 세계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3389억달러(약 374조원)로 2019년 2269억달러에서 매년 평균 7.6%씩 고성장이 예상된다. 이중 팹리스는 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 정부도 메모리 반도체를 이을 차세대 먹거리로 시스템 반도체에 주목한다. 하지만 파운드리와 함께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를 지탱하는 양대 축인 팹리스 산업은 국내에서 고사(枯死)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경제는 최근 국내 팹리스 상장사 중 매출액 기준 상위 20곳의 실적을 분석했다. 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는 제외했다. 그 결과 지난해 연매출 1000억원을 넘긴 팹리스는 실리콘웍스, 에이디테크놀로지, 제주반도체, 어보브반도체, 아나패스, 텔레칩스 등 6곳에 불과했다. 이중 아나패스는 1010억원, 텔레칩스는 1007억원으로 연매출 1000억원대에 간신히 턱걸이했다.

지난해 IT 호황 덕분에 국내 팹리스 1위(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 제외) 실리콘웍스가 사상 처음으로 연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아직 연간 매출액을 공개하지 않은 업체를 포함해 분석 대상 20개 팹리스의 매출 합계 추정치는 2조5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4% 늘었다. 하지만 이는 미국 AMD의 지난해 4분기 매출(32억4000만달러·약 3조6400억원)의 70%에 불과하다. 국내 20대 팹리스의 영업이익 총합 추정치도 약 800억원 정도다. 그나마 실리콘웍스(942억원)를 제외하면 적자다. 실제로 20곳 중 9곳이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 적자 상태였다.

반도체 부문별 주요 국가 점유율. /자료=한국수출입은행
사진설명반도체 부문별 주요 국가 점유율. /자료=한국수출입은행
한국은 사실상 팹리스 `빈국(貧國)`이다. 팹리스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1%대(삼성전자 제외)다. 2001년(0.7%)과 비교해 거의 20년째 성장이 멈췄다. 스마트폰용 터치 센서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인 코아리버의 배종홍 대표는 매일경제와 통화에서 국내 팹리스의 현실을 이렇게 말했다.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는 당장의 생존에 급급하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중국 업체와 경쟁도 어렵고 삼성·LG전자 같은 일부 대기업에 공급하지 않으면 매출을 내기 쉽지 않다. 잘 될 땐 300억원이 넘는 매출이 안 될 땐 100억원대로 떨어지는 등 업황 부침도 심하다."

팹리스는 PC의 중앙처리장치(CPU)·그래픽처리장치(GPU), 스마트폰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는 물론 AI 산업에 쓰이는 신경망처리장치(NPU) 등 첨단 반도체를 설계한다. 첨단 기술기업들은 팹리스 시장에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미국은 브로드컴·퀄컴·텍사스인스트루먼츠(TI)·AMD·엔비디아 등 세계 최고의 팹리스를 길러냈다. 종합반도체(IDM) 기업 인텔, 스마트폰 업체 애플의 반도체 설계 역량도 세계 최정상급이다. 미국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60%를 장악하고 있다.

파운드리 왕국 대만은 미디어텍·노바텍·리얼텍 같은 글로벌 팹리스를 거느렸다. 중국 역시 하이실리콘·유니SOC·ZTE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신흥 강자들이 떠오르고 있다. 대만반도체산업협회(TSIA)에 따르면 2019년 대만 상위 10개 팹리스의 매출 합계는 5012억대만달러(약 20조2200억원)로 같은 기간 한국 상위 10개 팹리스 매출 총액(약 1조8000억원)의 10배가 넘는다. 국내에서는 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와 LG그룹에서 곧 계열분리될 실리콘웍스가 그나마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팹리스로 꼽힌다.

국가별 시스템 반도체 기술수준. /자료=한국수출입은행
사진설명국가별 시스템 반도체 기술수준. /자료=한국수출입은행
한국이 강한 메모리 반도체, 파운드리는 제조공정 기술이 핵심이다. 팹리스는 각 기업이 수십년 간 쌓아올린 반도체 설계자산(IP)을 토대로 성장한다. 인텔과 AMD가 PC용 CPU를, 엔비디아는 GPU, 애플·퀄컴·미디어텍은 모바일 AP를 각각 과점하는 식이다.

한국 업계는 2000년대 초반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반짝 성장기도 맞았다. 그러나 모든 IT 기기를 집어삼킨 스마트폰 혁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파이가 쪼그라들었다.

정부는 팹리스를 키우기 위해 1998년 `시스템 IC(집적회로) 2010`, 2011년 `시스템 IC 2015`을 국책 사업으로 각각 추진했다. 세계 시스템반도체 점유율 7%, 3대 반도체 강국을 목표로 내걸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연평균 예산 182억원을 이 사업에 투입한 정부는 2011년부터는 150억원으로 줄였다.

한 예로 중소 팹리스들은 2010년대 중반까지 정부가 공유해준 반도체 설계 시스템을 활용해 저렴한 비용으로 신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지만 예산 삭감으로 2016년 해당 지원이 끊긴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중소 팹리스 대표는 "정부는 승승장구하는 메모리 산업 때문에 착시를 일으켜 시스템 반도체 육성을 소홀히 했다"며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급 설계 인력 양성은 공염불에 그쳤고 연구개발(R&D) 인프라도 망가졌다"고 말했다.

정부는 전력 반도체, 차세대 센서, AI 반도체 등에서 매출 1000억원 이상 `K-팹리스`를 키우겠다며 올해 총 2500억원 규모 R&D 지원책을 올해 꺼내들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시스템 반도체 성장을 위해 6500억원의 펀드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업계 반응은 차갑다. 파운드리 업계 한 관계자는 "6500억원짜리 펀드 중 팹리스 지원에 배정한 액수가 약 1000억원으로 안다"며 "중소 팹리스 한 곳이 시제품을 생산하는 데만 최소 10억원이 든다. 1000억원으로 큰 효과를 보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 둘째)이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한국수출입은행에서 열린 `제5차 혁신성장 BIG3 추진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시스템 반도체 성장을 위해 6500억원 규모 펀드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설명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 둘째)이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한국수출입은행에서 열린 `제5차 혁신성장 BIG3 추진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시스템 반도체 성장을 위해 6500억원 규모 펀드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반도체 전문가들은 영세한 팹리스들의 체급 키우기가 더 시급하다고 본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 고위 임원 출신 한 관계자는 "매출 수백억 원 단위 작은 팹리스들을 인수·합병(M&A)으로 통합해 맷집을 키워야 한다"며 "매출이 수천억 원에서 1조원만 돼도 글로벌 팹리스들과 경쟁하면서 AI 반도체 등 신제품 개발에 힘을 쏟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신생 업체의 진입·자생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미국은 1987년 2억달러를 들여 반도체 제조기술 연구조합(Sematech·세마테크) 출범을 지원했다. 세마테크는 미국 내 반도체 공동연구, 인력양성 거점으로 자리잡았다. 통신용 반도체 스타트업이었던 퀄컴도 세마테크의 도움을 받아 글로벌 팹리스로 발돋움했다. 이밖에 대만 정부가 1973년 세운 산업기술연구원(ITRI)은 TSMC·UMC·미디어텍 등 굴지의 파운드리·팹리스를 탄생시킨 산파 노릇을 했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 /사진=매경DB
사진설명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 /사진=매경DB
전문가들은 세계 반도체 산업의 중심지인 미국 실리콘밸리와 국내 팹리스의 인적 네트워크 활성화도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중국과 대만은 중화권 인재가 실리콘밸리에 세운 반도체 기업을 적극 지원하고, 다시 이들의 본국 투자를 유도해 첨단 반도체 기술을 교류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엔비디아 공동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 AMD CEO로 회사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리사 수가 대만과 실리콘밸리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대만계 이민자들이다.

[이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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